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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역사상 사망자가 가장 많은 전쟁 TOP10 학살 전쟁

피날레인생-:) 2024. 4. 20. 14:24

세계역사상 크고 작은 전쟁으로인해 많은 나라들이 망하고 죽고, 그로인해 경제가 성장한 나라도 있으며 패망한 나라도 많을것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등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전쟁인데 과연 역사상 큰 전쟁들 중에 사망자수가 가장 많은 전쟁은 무엇이 있을까요??


TOP 10- 러시아 적백내전(추정 사망자 : 9백만여명)

 

러시아 내전이라고도하고 적백내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쟁은 1917년 10월 25~ 1922년 10월에 10월 혁명이후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자마자 불셰비키의 군대가 미국, 영국 등의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무기봐 돈을 지원받는 러시아 자본가 군대인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하얀군대간의 싸움이다. 이 전쟁은 러시아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일본 등 다양한 나라의 세력도 지원을 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엄청나게 넓은 러시아 국토 여러군데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에는 볼셰비키가 이끄는 붉은 군대가 승리를 하였고 1922년에 저희가 많이 들어본 소련이 수립이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700~1200만 (평균 9백만여명) 정도가 사망을 했으며 내전이라도 같은 나라 사람끼리 즉결처형, 학살 등 잔인한 상황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 러시아내전(적백내전)은 20세기 가장 치명적인 분쟁 중 하나입니다.

 

TOP 9 - 제 1차 세계대전(사망자 추정 :  1천 5백만여명)

 

제 생각에는 위에 나온 사망자 추정수보다 훨씬 많을거 같은데 제가 이리저리 찾고 평균치를 낸거라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전쟁이며 이 전쟁으로 인해 기술 및 산업의 고도화와 참전국들의 혁명 등 포함한 정치적인 변화가 많은 전쟁이지만, 사망자가 너무 많아서 비극 적인 전쟁중 하나입니다.

1914년 부터 1918년 까지 유럽 중심으로 진행됬으며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되면서 분쟁이 촉발되었고, 이는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 연쇄 전쟁 선포로 이어졌습니다. 주요 교전국은 연합국(프랑스, 영국, 러시아, 이후에 미국 포함)과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제국)이었습니다. 참호전은 서부 전선의 잔혹한 전투를 특징으로 하는 반면 동부전선과 다른 전역에서의 전투는 정말 파괴적으로 전쟁을 했습니다. 전쟁에서 탱크, 비행기, 화학무기 등 신기술이 많이 사용되었고 이로 인해 엄청난 사망자수가 나왔습니다. 이후 1919년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전쟁을 종결 시켰고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하고 유럽의 지정학정 지형을 재편하였습니다.

 

TOP 8 - 티무르 정복전쟁(사망자 추정 : 1천 7백만여명)

 

타메를라네(Tamerlane)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티무르는 14세기 후반에 권력을 잡은 중앙아시아 정복자였습니다. 그의 정복 전쟁은 그의 제국을 아시아 전역과 중동으로 확장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 작전으로 특정했습니다. 티무르의 정복은 정말 잔인하고 무자비한 정복이라고 합니다. 티무르는 적들에게 두려움과 복종을 심어주기 위해 심리전, 대량처형, 도시파괴 등 무자비한 전술을 사용했고, 맹렬한 전사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티무르는 그의 전략적 탁월함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으로도 유명했습니다

 

티무르의 가장 중요한 원정 중 하나는 1381년 페르시아 침공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지배하고 있던 잘라이리드 왕조를 물리치고 그 지역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아나톨리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로 추가 원정을 시작하여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와 같은 주요 도시를 정복했습니다.

티무르의 정복은 중동에만 국한되지 않고 중앙아시아, 인도지역을 목표로 삼았고 중공침공을 시도 했습니다. 그의 군사 작전은 가차 없이 했고,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막대한 군대를 모으는데 비용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405년 티무르는 죽었지만 티무르의 제국은 티무르 왕조로 알려진 그의 후손들의 통치 아래 수십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국은 내부 분쟁과 주변세력의 외부 압력으로 인해 결국 분열되었습니다.

티무르의 정복전쟁은 정복한 지역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며 앞으로 수세기 동안 정치적, 문화적 지형을 형성했습니다.

TOP  7- 태평 천국의 난(사망자 추정 : 2천여만명)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지속된 태평천국의 난은 중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내전 중 하나였습니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고 믿는 실패한 학자 홍수취안(Hong Xiuquan)이 이끄는 반란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기독교와 중국 전통에 대한 급진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한 유토피아 사회인 태평천국(Taiping Heavenly Kingdom)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반란은 중국 남부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만연한 빈곤, 부패, 사회적 불안이 농민들 사이에 불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Hong Xiuquan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과 사회적 평등에 대한 약속은 불만을 품은 농민, 광부, 비밀 결사 회원을 포함하여 수백만 명의 추종자를 끌어 모았습니다.

태평군은 그들의 수도가 된 난징을 포함한 주요 도시와 영토를 신속하게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급진적인 이념과 잔혹한 전술은 잠재적인 동맹국들을 소외시켰고 청군과 지역 군벌들의 격렬한 저항을 촉발시켰습니다.

갈등은 양측의 대규모 전투, 포위 공격, 잔혹 행위로 특징 지어지는 장기간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서구열강의 지원을 받은 청나라 정부는 결국 군사력과 병참자원을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단결력이 부족하고 내부 분열에 직면한 태평군은 점차 약화되고 패배했습니다.

반란의 종결은 중국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청나라는 살아남았지만 약화되고 더욱 불안정해졌으며, 이후 내부 분쟁과 외국의 개입이 일어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태평천국 반란의 유산에는 수백만 명의 인명 손실, 광범위한 파괴, 수십 년 동안 중국 전역에 반향을 일으킨 심각한 사회적, 정치적 영향이 포함됩니다.

 

TOP6 - 스탈린의 대학살(사망자 추정 : 2천만여명)

스탈린주의 대학살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53년 사망할 때까지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련을 통치하는 동안 그의 지휘 하에 자행된 대규모 탄압과 숙청을 가리킨다. 이 극심한 폭력과 테러의 시기는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 직접 처형과 Gulag로 알려진 강제 노동 수용소의 가혹한 조건을 통해.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한 후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공산당과 국가기구 내에서 권위가 강화되었다는 점에서 두드러졌습니다. 그는 소련의 산업화와 현대화를 목표로 하는 일련의 정책을 시작했는데, 이는 종종 막대한 인적 비용을 치르게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에는 농업의 강제 집단화가 포함되었으며, 이로 인해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하고 수백만 명의 농민이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학살의 가장 끔찍한 측면을 초래한 것은 스탈린의 편집증과 무자비한 권력 추구였습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스탈린은 공산당, 정부, 군대 및 기타 기관 내에서 일련의 숙청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숙청은 정치적 경쟁자, 지식인, 소수 민족 및 스탈린의 권위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국가의 적이라고 인식되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숙청은 피고인이 자신이 저 지르지 않은 범죄를 자백하도록 강요받는 쇼 재판으로 특징 지어졌으며 종종 가족에 대한 고문이나 폭력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재판은 탄압을 정당화하고 대중을 협박하여 복종시키기 위해 고안된 널리 알려진 선전 행사였습니다.

숙청의 희생자 중에는 레온 트로츠키와 같은 저명한 당원뿐만 아니라 "반혁명분자", "스파이" 또는 "사보타주"라는 혐의로 임의로 비난을 받은 일반 시민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쿨락(부유한 농민)과 같은 소수 민족과 우크라이나 같은 소수 민족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숙청 외에도 스탈린은 집단화의 적들로 인식된 제거를 목표로 하는 탈쿨라키화(Dekulakization)로 알려진 농민에 대한 테러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수백만 명의 농민이 강제 이주, 추방, 처형되었으며, 그들의 토지는 국가에 의해 몰수되었습니다.

1936~1938년의 대숙청은 스탈린주의 탄압의 정점을 나타낸다. 이 기간 동안 수십만 명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했으며, 수백만 명이 굴라그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숙청으로 인해 공산당과 붉은 군대의 세력이 쇠퇴했고, 소련은 외부 위협에 취약해졌습니다.

스탈린주의 학살은 소련 사회에 심오하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국가의 적으로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목소리를 내거나 반대 의견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와 불신의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숙청은 또한 공산당의 신뢰성과 정당성을 약화시켰고, 이는 혁명의 이상에 대한 믿음의 상실로 이어졌습니다.

스탈린주의 학살로 인한 인적 비용은 엄청났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직접적인 폭력이나 강제 노동의 가혹한 환경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족 전체가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경험으로 인해 충격을 받았습니다.

스탈린의 몰락과 궁극적인 소련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주의 학살의 유산은 계속해서 러시아 국민의 집단적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스탈린주의 정권의 범죄는 광범위하게 문서화되고 규탄되었지만, 이 암울한 역사의 시기에 가해진 고통의 전체 규모는 결코 완전히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TOP5 - 이자성의 난(사망자추정 : 2천5백만여명)

명나라의 멸망과 이자성의 난은 중국 역사에서 깊게 얽혀 있는 사건으로, 중대한 정치적 격변과 사회 불안의 시기를 나타냅니다.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중국을 통치한 명나라는 말년에 내부 쇠퇴와 외부 압력을 겪었습니다. 경제적 불안정, 부패, 기근, 사회적 불만은 중앙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만주족이 주도하는 청나라가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등 외세의 도전에도 직면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명나라 농민 반군에서 도적 지도자로 변신한 이자성이 명나라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이자성은 명나라 정부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을 이용하여 농민, 불만을 품은 군인 및 지역 민병대를 결집했습니다.

이자성의 반란은 17세기 초에 그의 군대가 영토를 점령하고 명나라 충성파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추진력을 얻었습니다. 1644년 리의 군대는 이미 내부 분쟁과 기근으로 약화된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포위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베이징 근처 만리장성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장군 우 삼계(吳삼계)가 성문을 열어 리의 군대가 도시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베이징의 함락은 명나라의 통치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충전은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자살했습니다. 이자성은 자신을 순 왕조의 통치자라고 선언했지만 그의 통치 기간은 짧았고 무질서와 불안정으로 얼룩졌습니다.

그러나 리의 반란이 명나라 멸망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지배 엘리트 내부의 분열과 부패, 경제적 쇠퇴와 같은 체계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왕조의 멸망에 기여했습니다. 게다가 청나라의 북쪽 침략은 명나라의 권위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청나라는 중국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만주족이 이끄는 청나라는 20세기 초까지 중국을 통치하면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왕조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명나라의 몰락과 이자성의 난은 중국 역사에서 중추적인 순간을 나타내며, 한 지배 왕조에서 다른 왕조로의 전환을 표시합니다. 이는 또한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를 형성하는 내부 및 외부 요인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강조합니다.

TOP 4 - 안사의 난(사망자 추정 : 3천 6백만여명)

안사반란과 관련하여 혼란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나라 시대에 특별히 '안사의 난'이라고 불리는 잘 알려진 난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 왕조의 통치 기간(618-907 AD) 동안 상당한 봉기와 반란이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제국의 역사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나라의 가장 유명한 반란 중 하나는 서기 755년에 발생한 안록산의 난입니다. 안록산 장군이 이끄는 이 반란은 제국의 북동부 지역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곳에서 안녹산이 군사 총독(제두시)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반란의 원인은 경제적 불만, 민족적 갈등, 당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 등 복잡했습니다.

안록산(An Lushan)의 군대는 빠르게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현재의 시안)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반란으로 인해 제국은 엄청난 인명 손실과 광범위한 파괴를 겪는 파괴적인 내전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당나라는 결국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이는 제국을 약화시키고 결국 제국을 쇠퇴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당나라의 또 다른 중대한 반란은 9세기 후반에 발생한 황조의 난이다. 반군 지도자 황차오(Huang Chao)가 이끄는 이 봉기는 농업계의 불만, 무거운 세금, 당 정부 내부의 부패로 인해 촉발되었습니다. 반란은 더욱 강력해졌고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당나라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당나라는 광활하고 다양한 제국을 통치하는 데 따른 어려움을 반영하여 역사 전반에 걸쳐 수많은 반란과 봉기에 직면했습니다. 일부 반란은 제국 당국에 의해 성공적으로 진압되었지만, 다른 반란은 왕조의 안정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결국 왕조의 몰락에 기여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당 왕조의 반란은 제국의 역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중앙 권위와 지역 권력 사이의 긴장은 물론 인구가 직면한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을 강조했습니다. 구체적인 "안사 반란"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나라 시대의 더 광범위한 반란과 저항 패턴은 중국 역사 기록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TOP 3 -몽골의 정복전쟁(사망자 추정 : 4천만여명 이상)

 

징기스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이끈 몽골 정복 전쟁은 13세기와 14세기에 걸쳐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군사 작전 중 하나였습니다.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등장한 몽골인들은 끊임없는 확장 캠페인에 착수하여 궁극적으로 역사상 가장 큰 연속 육상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테무진으로 태어난 징기스칸은 외교와 동맹, 군사력을 결합하여 몽골 부족을 통일했습니다. 1206년에 그는 대칸, 즉 우주의 통치자로 선포되어 인근 영토를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몽골 정복의 특징은 속도, 기동성, 잔혹성이었습니다. 위장 후퇴, 심리전, 기병의 효과적인 활용과 같은 혁신적인 군사 전술을 사용하여 몽골인들은 번개처럼 빠른 공격과 파괴적인 습격으로 적을 압도했습니다.

몽골인의 성공의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정복된 민족의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통합하려는 적응성과 의지였습니다. 그들은 요새화된 도시와 요새를 정복하기 위해 공성 무기, 중국 화약 무기, 숙련된 기술자를 고용했습니다.

몽골제국은 아시아, 유럽, 중동의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면서 급속도로 팽창했습니다. 그들은 호라즘 제국, 중국의 금 왕조, 키예프 루시 등 강력한 제국을 물리쳤습니다. 1279년까지 몽골인들은 태평양에서 지중해까지 유라시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몽골제국은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통치하는 4개 칸국, 즉 동유럽의 황금 호드,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 페르시아의 일칸국, 중국의 원 왕조로 나누어졌습니다. 각 칸국은 반자치적으로 운영되었지만 대칸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 통일된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잔인하다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몽골인들은 종교적 관용, 효율적인 행정, 무역 촉진 정책을 시행하여 제국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결국 내부 분열, 외부 압력, 그리고 그렇게 광대한 영토를 통치해야 하는 어려움에 굴복했습니다. 징기스칸이 죽은 후 제국은 더 작은 칸국으로 분열되어 각각 권력과 영향력을 놓고 경쟁했습니다.

몽골의 정복 전쟁은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왔고 앞으로 수세기 동안 세계 역사의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실크로드를 따라 문화 교류와 무역을 촉진하고 동서양을 연결했으며 새로운 제국과 문명이 탄생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요약하면, 몽골 정복전쟁은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지형을 재편하고 그들이 정복한 지역에 지속적인 유산을 남긴 변혁적인 사건이었다.

 

TOP2 - 중국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 사망자 추정 : 4천만여명 이상)

 

1966년 마오쩌둥이 시작한 문화대혁명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보존하고 국가의 적들로 인식된 이들을 숙청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소란스럽고 폭력적인 사회정치적 운동이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지속된 이 사태는 중국 사회에 심오하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쳐 광범위한 혼란과 고통, 인명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의 가장 비극적인 측면 중 하나는 그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사망자 수였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 부족하고 중국 정부의 검열이 부족하여 정확한 수치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격변의 직간접적인 결과로 수백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문화대혁명의 폭력성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정치적 박해와 숙청은 지식인, 당 관리, 교육자 및 마오쩌둥의 권위나 공산당 이데올로기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되는 사람을 포함하여 "반혁명분자", "부르주아 분파" 또는 "자본주의 옹호자"로 간주되는 개인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인 굴욕, 고문, 투옥, 처형을 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아, 강제 노동, 노동 수용소나 감옥에서의 의료 부족으로 사망했습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공동체는 분열되었으며, 이웃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혁명의 열정으로 서로 등을 돌리면서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마오쩌둥에게 충성하는 청년 무장 단체인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정책을 집행하고 폭력과 위협 행위를 자행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낡은 사상', '낡은 관습', '낡은 문화', '낡은 습관'과 관련된 개인과 기관을 표적으로 삼아 역사적 유물, 종교 유적지, 문화 유물을 파괴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촉발한 혼란과 불법은 또한 광범위한 사회적 격변과 경제적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학교와 대학교는 문을 닫았고, 지식인들은 박해받았으며, 교육은 심각하게 중단되어 모든 세대의 젊은이들이 배우고 발전할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문화대혁명은 경제 정책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면서 생산성과 혁신을 억제했습니다. 공장이 문을 닫고, 농업 생산이 감소하고, 기반 시설 프로젝트가 중단되어 빈곤과 궁핍이 만연해졌습니다.

인명 손실과 경제적 어려움 외에도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에 오랫동안 심리적, 사회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폭력과 억압의 유산과 씨름하면서 운동이 공식적으로 끝난 후에도 트라우마, 두려움, 불신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문화대혁명은 만연한 고통과 폭력, 인명 손실로 특징지어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의 어두운 장이었습니다. 중국 사회에 대한 이러한 심오한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느껴지고 있으며, 미래에 유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과거를 기억하고 고려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TOP1 - 제 2차 세계대전( 사망자 추정 : 7천만여명 이상)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지속된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쟁으로,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두 개의 적대적인 군사 동맹, 즉 연합군과 추축국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전쟁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 경제적 불안정, 영토 야망, 이념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습니다.

전쟁의 주요 교전국에는 미국, 소련, 영국, 중국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과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일본 제국이 이끄는 추축국이 포함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돌프 히틀러의 공격적인 팽창주의 정책과 동유럽을 비밀리에 영향권으로 나누는 독일과 소련 사이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따른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었습니다.

프랑스, 저지대 국가, 소련 침공에 사용된 전격전 전술을 포함하여 독일의 정복이 대륙 전역으로 퍼지면서 유럽에서의 전쟁은 빠르게 세계적인 갈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영국 전투에서는 영국 공군이 독일의 공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영국 침공을 막았습니다.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이 1937년 중국 침공과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이어져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습니다. 태평양 전역에서는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작전, 연합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사용한 섬 도약 전략 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쟁은 나치 독일에 의해 수백만 명의 유대인과 함께 600만 명의 유대인이 조직적으로 살해된 홀로코스트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잔학 행위로 특징지어졌습니다. 또한 미국은 도시를 폭격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등 잔인한 전술을 사용하여 전례 없는 파괴와 민간인의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동부 전선에서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추축국을 패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의 전환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했고 결국 소련 영토에서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는 연합군이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D-Day를 개시하여 독일에 맞서 제2차 전선을 열었고 결국 서유럽을 나치 점령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연합군의 독일 진격은 1945년 5월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태평양에서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습니다. 전쟁의 종결은 유엔의 창설과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의 시작을 포함하여 세계 질서를 재건하고 재편하려는 노력으로 특징지어지는 전후 시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고, 역사의 흐름을 형성하고 심오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로 인해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약 7천만~8천5백만 명이 사망했으며 수백만 명이 난민과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쟁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느껴지며, 미래에 그러한 재앙적인 갈등을 예방하는 데 평화, 협력, 국제 대화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